|
< 지식보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
요새 학력을 대단히 중시합니다.
학력도 어느 정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학력을 글자 그대로 ‘배워서 생긴 지적인 능력’이라고 하면 학력 유무는 명문대를 졸업한 것만으로는 판명되지 않습니다.
명문대를 나왔지만 실제로는 지적인 능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고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지적인 능력은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대학 타이틀과 실제 학력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하자 당시 최고의 학력을 가진 니고데모는
“어떻게 사람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고 물었습니다(4절).
그때 예수님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원리를 말씀하자 니고데모는 다시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무식해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10절).
이 장면은 지식보다 믿음이 더 중요함을 잘 말해줍니다.
남이 발견하고 축적한 지식을 믿지 않으면 새로운 지식을 더할 수 없기에 결국 배움과 지식도
그 밑바탕에는 믿음이 깔려있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삶에서도 믿음이 그 바탕에 깔려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이나 사먹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한 시도 살 수 없습니다.
그토록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처럼 중요한 믿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믿음의 최고봉’은 바로 ‘영생의 믿음’입니다.
영생의 믿음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임을 믿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13-15절).
<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 >
하나님은 광야에서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놋 뱀을 바라보면 산다고 하시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말씀에 아멘 하고 그대로 순종한 백성들은 살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영접할 때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아도
그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을 얻습니다.
결국 믿음은 순종입니다.
참된 믿음은 누가 확실한 증명을 해줄 때 주님께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몰라도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이유를 따지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지만 믿음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과 축복을 굳게 믿는 것이지
‘맹목적인 의뢰’는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서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차이가 납니다.
진짜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지만 가짜 믿음은 ‘자기 요구가 관철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것도 마치 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믿음으로 구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줍니다.”
이것이 가짜 믿음의 산물입니다.
이런 가짜 믿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황된 마음을 가지고 좇아갑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시는 분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시는 분입니다.
참된 믿음은 성경과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하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 없이 무작정 믿는 것은 허황된 가짜 믿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요새 뉴 에이지 사상이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합니다.
뉴 에이지 사상도 믿음을 강조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하나님의 뜻도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도 없습니다.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으면, 이뤄진다고 합니다.
내가 마음 수련을 하고, 나를 찾는 명상을 하며, 나의 존재를 깨달으면 해탈(?)하여 다 이뤄진다.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약속에는 관심도 없이 무조건 “믿으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충고입니다.
그런 믿음은 더욱 큰 고난과 시험과 문제를 야기합니다.
믿음이란 낙관도 아니고, 최선을 희망하는 것도 아니고, 적극적인 사고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1-2).
‘실상’의 원어적인 의미는 ‘견고한 터전’입니다.
즉 믿음은 ‘두부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반석 위를 걷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과감히 영적 모험의 길로 나서는 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 이 한규 목사의 칼럼중에서,,.
|
교회의 본질과 목적은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거나, 성도들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나 구제나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셨다면 '잘 살아보세.'라던가, 새마을운동이라던가 이런 운동을 전개하셨을 것입니다. 의식 구조를 바꾸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부지런함의 필요와 근면의 필요를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정신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어 받았기 때문에 베드로가 미문가에 앉은 거지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3:6)"라고 했습니다. 은과 금을 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플러스 알파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오늘날 기독교는 타락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질을 알고 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복음의 초창기였던 초대 교회 당시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지금이나 여전히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며, 우리가 이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글을 보시고 댓글을 주신 분에게 우리 교회가 설립된 것이 사람의 뜻에 따라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된 것임을 믿음 앞에 서서 주님께서 주신 우리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일터가 삼위일체로 행복하여야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는데.....요즈음 이사를 하여 어떤 교회를 가야 하나 기도 중에 있답니다 목사님을 잘 만나야 할텐데....
목회자들은 우선 신실한 삶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하고 설교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교회를 만드는 중심에는 바른 설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문제가 있거나 어려운 교회들을 보면 거의가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한마디로 목사님 말씀에 은혜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목회자가 다른 테크닉을 자꾸 배우려고 뛰어 다니지 않는, 오직 말씀을 바르게 연구하며 교인들에게 큰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설교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실한 목회자가 될 때 신실한 교회가 자연히 만들어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뜬구름 잡는 것에 너무 현혹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신실하게 만드는 것에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이런 목회자가 섬기는 교회를 만났으면 합니다.
창 아~정말 마음이 확 뚫립니다. 맞아요^^ 병들어가고 지쳐가는 우리 세대의 교회의 모습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나부터 변하고자 합니다. 나부터요...오늘 하루 종일 무거운 마음이 있었답니다. 이 글을 보니 해답을 얻은 듯 합니다. 맞아요...주님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행복해지고 건강한 정신과 육신을 지니며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교회도 가정도 우선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처럼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교회와 가정이 모두다 중요합니다. 대게...교회가 먼저라고 외치며 가정 일을 뒷전에 둬도 괜찮다라는 그 생각들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자녀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 주는 일군들 많이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참..가슴이 아픕니다. 그걸 마치 믿음의 깊이로 체크하는 분들 계십니다.
아무게 집사는 순종했기에 믿음이 크고 그렇지 않은 자는 믿음이 작다 하지요~믿음의 크기와 깊이를 감히 우리의 입으로 판단하며 점수를 매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모두다 주님의 자녀이며 훗날 본향에 가서 모두 함께 만나야 할 형제 자매들인데 어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가슴이 아팠습니다.
대형교회...성전 건축에만 목을 매는 이 한국 땅의 교회가 과연 옳은 길로 가는 것인지...기도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진정 성전 건축과 바닥에 대리석을 깔고 입구를 넓히며 그 지역을 대표로 하는 성전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성전입니까? 내 교회가 더 좋다. 오직 내 교회가 최고다~ 아니요~그건 아니지요^^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답고 정직한 교회가 주님의 틀림없는 이 마지막 때의 귀한 교회 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열 명 모이면 열 가지 교회관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에 대해 각자 다른 관점을 가졌다는 뜻인데, 한국교회 안에 이런 교회관의 혼동의 문제가 있는 것은 신학적인 논리를 떠나 아래 예화를 소개 함으로 각자가 느끼고 있는 한국교회를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몇 년 동안 고생해 완성한 ‘최후의 만찬’을 공개하기 위해 지인들을 초청했습니다. 드디어 천이 벗겨지고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한 친구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군. 예수의 손에 들린 저 광채 나는 유리잔을 보세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붓을 들어 유리잔 부분을 뭉개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을 향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실패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시선이 예수의 얼굴에 집중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유리잔에 시선이 모아졌다면 그것은 제 의도를 벗어난 것이지요.” 그는 유리잔이 예수의 표정을 가리지 않도록 다시 그림을 그려 완성시켰습니다.
현대인들은 종종 예수의 손에 들린 광채 나는 유리잔에 환호하는 우를 범합니다. 신앙은 삶의 본질을 찾는 과정입니다. 신앙은 유리잔에 가려진 예수의 얼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알려면 교회의 주인이요 설립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교회의 본질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8절>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 자신이 교회의 설립자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며, 주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야지 목회자나 성도가 교회의 주인 행새를 하게 되면 교회의 본질에서 떠난 것입니다. 대개 교회 안에서 다툼이 생기는 것은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예수님 중심으로 한 마음 한 뜻이 될 것입니다.
*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남을 보기전에 거울앞에 나를 세우는,
그러한 시간을 갖고자, 옮겨온 글 입니다.
* 주님 주시는 평강 가운데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셨지요 !!